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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누나가 본 기형도 시인의 삶과 죽음 / 뉴스 1 (2017.11.12(목))

관리자 │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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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누나가 본 기형도 시인의 삶과 죽음

[단독인터뷰] 기향도 기형도문학관 명예관장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7-11-12 11:52 송고 | 2017-11-28 16:00 최종수정 
               
기형도문학관에 전시된 기형도 시인의 사진들© News1


"동생은 생선국이나 고깃국을 끓이고 그릇에 퍼담아 상에 올리면 자기 국 그릇에 숟가락을 넣고 저어 보고는 그릇속 고기 건더기를 건져 엄마 국 그릇에 옮겨 놓곤 했습니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열무를 팔러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기형도 시인. 어린시절의 가난과 고통을 주로 시에 담은 시인이지만 가난한 집안 살림이 가족간의 애틋한 마음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젊은 나이에 아까운 생을 마감한 고 기형도 시인(1960~1989)의 문학관이 지난 10일 시인이 자라고 요절전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던 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268에 개관했다.

유족을 대표해서 새로 건립된 기형도문학관의 명예관장이 된 누나 기향도 씨(64)가 동생을 추억하며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의 어린날과 가족들의 추억 등을 이메일로 알려왔다. 생전에 기 시인은 국 속의 고기를 몰래 어머니 그릇에 옮겨놓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었고 어머니 또한 먹고사는 일에 바빠 아들에게 표현을 못했지만 속 깊은 기 시인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다음은 기향도 명예관장과 이메일로 주고받은 인터뷰 전문이다. 



기형도 시인의



-기 시인은 3남4녀중 막내였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형제자매는 어떻게 되는가. 

▶막내인 형도와 그 위에 여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리고 나머지 형제들은 생존해 있다. 그가 쓴 ‘안개’ ‘나리 나리 개나리’ 등에 먼저 세상을 떠난 누이에 대한 애절한 슬픔과 그리움, 고마움을 담고 있다.

-정확히 시인이 살던 집은 어디인가. 문학관은 접근성을 고려해 생전에 시인이 살았던 집터 근처인 지금의 위치에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사라지고 없고 집터는 창고건물이 되어 있다. 얼마전에 집터까지 걸어보니 문학관이 세워진 곳에서 25분 정도 걸리더라. 아파트 단지라 둘러가고 건널목이 있어서 거리상으로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광명시 서면에 있는 운산고등학교 학생들이 집터 자리 앞 담벽에 팻말을 만들어 세워 동생이 살던 집터가 이곳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가보면 검은 비닐하우스도 서 있는데 눈짐작해보면, 창고건물은 마당자리인 것 같고 창고와 붙어 지어진 비닐하우스가 집이 있던 장소 같다. 

-기형도 시인의 시에는 어두운 방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거나 상장을 접어 종이배로 띄우는 대목이 나온다. 가난했지만 서로간의 애틋한 마음을 가졌던 가족간의 추억을 이야기해달라. 

▶형도가 초등학교 3학년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어머니가 가장이 되셔야 했다. 시 ‘엄마 걱정’에 나오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처럼 어머니는 소작도 짓고, 열무를 재배하여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시장이며 개인집, 영업집등에 가 팔았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열무 한 단은 다른 사람들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아주 솜씨좋게, 예쁘게 단을 묶는 법을 식구들에게 가르쳐 주곤 했다.
 
또 이번에 문학관에 유품을 기탁하면서 많이 찾아낸 것 중 하나가 동생의 상장이었다. 죽은 아들을 못 잊는 어머니가 라면 박스 등에 동생의 유품을 지니고 계셨다. 몇번이나 이사하셔서 많이 분실되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보니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방위 시절까지 동생은 상을 안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사는 데 바빠서 자식이 상장을 타와도 칭찬해주거나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동생은 그래서 쓸쓸한 마음에 상장을 종이배로 접어 안양천을 건너 집으로 오다가 물위에 띄웠다. 또 동생이 초등학교 때 쓴 '지금 그가 가고 없지만, 그러나 그가 살아있다'는 내용의 시도 있었다. 때가 되면 (이 시도) 알리게 되리라 생각한다.  

-가족들간의 재미있는 추억은.

▶형도는 만화를 아주 잘 그리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었다. 그가 그린 만화를 모아 두었던 것이 두서너 박스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것은 없다. 대신 초등학교부터 대학생 때까지 노트 구석에 그린 재미있는 삽화나 그림들이 발견된다.

동생은 그린 만화들을 ‘몇 집에 몇 권’ 이런 식으로 묶었다. 자신이 만든 만화책 한 권을 형제들이 다 보면 동생은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다음 만화책은 언제쯤 나온다"고 광고를 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책이 귀하던 시절이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우리집은) 책을 사기가 힘들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아들을 추억하는가. 

▶어머니는 종이배를 냇물에 띄워 보낼 정도의 외로움과 아픔 속에 살았던 동생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 말 잘듣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엄마 속을 한번도 상하게 한 적이 없는 좋은 아들이었는데 칭찬 한번 해 준 적이 없고, 사랑한다고 한번 말해 준적이 없었다고…. 우리의 어린시절에 대한 아픈 그리움과 외로운 삶, 미래가 암담했던 시간들이 떠올라 나도 이 글을 적으면서 눈물이 난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다. 형도는 '자기가 쓴 글을 많은 사람이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자나 깨나 동생이 유언처럼 했던 말을 생각하시면서 눈물로 많은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예전에 살던 집은 외지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하는데, 하루는 고등학교 다니는 옆집의 여학생이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 집에 돌아오는 동안 앞에 가는 어떤 사람이 뭔가를 계속 중얼중얼거렸다. 그 학생은 '어떤 정신병자가 길을 가고 있는가' 싶어 무서웠는데, 알고보니 앞집 할머니였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동생을 잃은 어머니께서 그 외로운 길을 걸어 가면서 동생을 그리워하며 중얼중얼 소리내며 걸어 다니셨던 거다.

-기형도 시인의 벗들은 시인이 사망하기 전에 고혈압도 있고 스트레스도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혈압이 높다. 그래서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어머니도 혈압약을 복용했다. 그러나 동생이 고혈압이었다고는 듣지 못했다. 스트레스 받는 것은 기자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안다. 그런데다가 어머니가 "형도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숙제를 다 한 다음에 밥을 먹었다"고 할 정도로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삶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동생은 그가 가장 하기를 원하던 일인 시쓰기를 해야 했다. 문학관에 전시된 자필 노트등을 보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다 갔는지 알 수 있다. 동생은 기자가 된 후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됐는데 어머니에 따르면 동생은 "다른 무엇보다 ‘시인’이 되어서 좋다"고 어머니께 말했다.

-너무 짧은 생을 살다간 동생 이름의 문학관이 개관했다. 감회가 어떤가.

▶나는 개인적으로 동생의 책이 출판되면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면, 동생이 살았던 광명시에 그의 이름으로 문학관이 세워지면서 그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삶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인 시 ‘빈집’처럼 동생은 자신의 모든 것을 먼저 버린 후에 다시 문학관을 통해 새롭게 자신의 빈집을 채우는 삶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광명시에서 이 아름다운 일을 시작해주었고 시인 기형도의 문학세계와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힘을 모아 문학관을 건립했다.

문학관이 서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오래 생각하며 마음에 두었던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문학이란 '한 사람의 삶의 희로애락이 글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들의 삶의 희로애락을 만나 서로 만지고 만져져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위로받게 하는 아름다운 일'인 것 같다. 새로운 삶으로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청춘의 언어’가 있는 기형도 시인의 '집'인 기형도문학관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기를 기원한다.



기형도문학관(광명문화재단 제공)© News1




◇'영원한 청춘 시인' 기형도 시인은 누구

기형도 시인은 1960년 3월13일 경기도 옹진군(현재는 인천광역시) 송림면 연평리 392번지에서 아버지 기우민과 어머니 장옥순 사이의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4년 경기도 시흥군으로 이사해 1967년 서면 소하리(지금 광명시 소하동 701-6번지)에 새집을 지어 옮긴 후 타계할 때까지 살았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수준이 남달랐고 노래와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다. 서울의 시흥국민학교, 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로 통학하는 동안 최상위 성적과 다양한 예능 활동으로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계 전체가 가난하게 살게 된 일, 중학교 3학년 때 바로 위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 안개가 많이 끼는 안양천이라는 주변 환경 등은 시인의 내면에 깊이 체화된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에 입학하고 나중에 정치외교학과를 전공하지만 대학 생활은 주로 ‘연세문학회’와 더불어 했다. 캠퍼스에서 주점에서 합평과 토론을 이어가며 암울한 1980년대를 이겨냈다. 1981년 방위병으로 입대, 근무지인 안양 지역의 문학동인 ‘수리시’에 참여했다. 이때 초기작의 대부분을 쓰고 정리한다. 복학하고 부지런히 작품을 써서 기성문단에 투고하던 중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한다.

졸업 전인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이후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많은 문우들과 교류했다. 1980년대 젊은 시단의 한 축이던 ‘시운동’ 동인 모임에도 적극 참여했고 왕성한 시작 활동으로 주목을 끌었다.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3월9일, 경기도 안성 소재의 천주교 수원교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같은 해 5월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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