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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기 문학평론가_기형도 시 '유기체적 자아와 반어성' / 문학뉴스 (2017.11.22(수))

관리자 │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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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 ‘유기체적 자아와 반어성’

지난 10일 문을 연 기형도문학관이 임우기 장석주 김응교 등 문학평론가들을 초청해 기 시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릴레이 강연회를 열고 있다. 24일 오후 2시30분 강연에 나서는 임우기 문학평론가가 <문학뉴스>에 강연초록을 보내왔다. 20일 첫회에 이어 두번째 글을 싣는다. 발표문 전문은 다음 달 발행되는 계간 <문학의 오늘> 겨울호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기형도 시의 유기체적 자아 (2)

 

(임우기 문학평론가, 사진=남궁은 기자)

 

기형도 시가 보여주는 비밀스런 정신의 현상은 무한한 변화의 묘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은 기형도의 시는 고정된 대상이거나 존재물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존재성을 끊임없이 시적 존재로 불러들임, 즉 시적 자아 안에 있는 낯선 초월적 존재를 내밀하게 시적 존재의 지평에서 불러들임을 뜻한다. 기형도 시에서 고통스런 현실 상황에 처한 시적 자아는 마침내 상황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지평을 자각하는 동시에 초월적 자아로 트랜스trans를 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망적 현실 상황을 단지 초월하는 시적 자아가 아니라 절망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려는 희망적-반어反語 irony적 자아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유기체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바로 그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삶의 넓은 지평을 열어놓는 것이고 여기서 죽음의 아이러니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라는 시구는 유기체적 자아의 생사관을 드러내준다. 작은 죽음은 큰 죽음들을 거느리고 죽음과 삶이 무한히 이어지며 펼쳐진 그물과 같은 유기체적 생사관. 역설적이고 반어적 관계가 무한히 펼쳐지는 가운데 유기체적 자아는 반어적 주체로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인용 시구처럼 죽음의 아이러니 혹은 존재의 변화무쌍한 아이러니가 시적 자아의 고유한 존재성을 따라 자유로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적 주체는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생각나는 주체이며, 기억하는 주체가 아니라 기억나는 주체이다.

 

유기체적 자아는 주체의 인식 과정에서 파악되지 않는 소외되고 이탈한 존재자들을 존재로서 끌어안는 것이다. 이때 반어가 발생하며, 유기체적 반어는 이성적인 자아가 아니라 초이성적인 시적 자아의 존재로부터 나오게 된다. 이 시에서 서술되어 있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시적 자아가 동요풍童謠風으로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아이러니컬한 시구를 의미맥락을 이탈한 채로 불러내올 수 있는 것도 초월적 시간과 유기체적 존재의 활동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기형도 시의 그늘이요 시적 자아의 그림자인 유기체적 자아의 존재성을 접하게 된다.

 

 

기형도 시 특유의 반어反語는 유기체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기형도 시가 유기체적 상상력에서 발원한다는 말은 시인의 주관적 의식에서 그 상상력이 비롯된다는 의미 넘어서 유기체 자체가 시에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기체적 상상력은 주관의 의식이나 이성 너머에 그 자체로서 ‘이미 시원적이고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이미 시원적이고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유기체적 감성과 정념을 시의 존재 가능성으로 ‘부르고 이름하는’ 상상력. 이 유기체적 상상력은 시인을 초월해서 주체의 인식 밖에 낯설게 존재하는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유기체적 상상력을 통해, 천지만물이 서로를 연결하고 조화하며 저마다를 드러내는 존재자들의 존재가 시적 존재로서 불러들여질 때, 시적 존재는 스스로 반어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시적 존재도 존재인 한, 반어irony를 근본 성격으로 삼는다. 기형도 시에서 그 대표적인 반어가 ‘겨울의 아이러니’이다. 기형도 시에서 겨울은 경험적 시간으로서의 겨울이 아니라 반어적 시간으로서의 겨울이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마지막 연(강조 필자)

 

위 시에서, 시적 자아는 삶의 고통과 암담을 비유하는 겨울 이미지를 ‘겨울의 아이러니’로서 변화시킨다. 겨울의 아이러니는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고드름”같은 존재로 비유된다. ‘고드름’은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 또는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 “생을 적시는 즐거운 액체”로서 겨울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시간의 표상 곧 존재의 표상이다. 이 ‘반어적 겨울’ 곧 절망의 아이러니로 인하여, “즐거운 액체”로서의 존재 가능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겨울의 반어가 유기적인 반어이기에,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는 우주宇宙라는 유기체의 상상력이 자유분방하게 이어질 수 있다. 유기체적 자아는 얼어붙은 거리 위에 펼쳐진 우주론적 생명계를 통각統覺하고 있는 것이다. 달과 해, 지구 같은 것들도 하나의 유기체—비유기적인 것을 포함한 유기체—로서의 존재의 이름들이다. 세속의 거리 위에서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는 현존재는 반어적 존재이다.

 

 

기형도의 시가 그 자체로 유기체적 존재의 지평에 들어설 때, 기형도 시는 그 자체로 실존한다. 시 스스로 존재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이때 시 또한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시’가 된다. 비유컨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시인이 시를 낳았지만 시는 시인을 떠나 시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되어 시인과는 별개의 존재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기형도의 널리 알려진 명시 「엄마 걱정」도 이러한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시적 존재성을 보여준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전문(강조 필자)

 

시적 자아는 유년시절 어두운 방안에 홀로 남겨진 불안한 의식과 정서를 기억한다. 시인은 유년기적에 학교가 파한 후 아무도 없는 집에 와 혼자 숙제를 하며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던 애처로운 옛 기억을 되살린다. 하지만 이 시는 시적 존재를 은폐된 시간성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 주목되어야 한다. 그것은 앞서 살폈듯이 존재를 시간성의 형식 속에서 이해하는 존재론적 관점의 연장이다. 즉 성년이 된 시적 자아는 유년의 자아로 여행하는 시간의 구성이 시적 형식의 기본을 이룬다. 이 과거의 유년기로의 시간 여행은 현재의 시적 자아의 본래성으로의 여행이라는 형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이다.

 

지나간 유년의 과거도 성년의 현재도, ‘빗소리’의 존재에 의해 시간을 탈시간화하고는 어떤 근원적 존재로서의 시간성 또는 본래적 시간성은 이미 나의 존재에 앞서 있다. 거기에 있는 현존재Dasein를 자기 존재 안으로 불러들이(‘존재의 부름-도래到來’) 듯이인식 밖의 앞서 있는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을 존재 안으로 새로이 불러들이는것이다. 이때 빗소리의 시간성은 낯선 시간성이요 낯선 존재이다. 이렇듯 기형도 시에서 시간성은 주체의 인식 안에서 있지 않고 인식의 바깥에서 낯선 현존재에 이미 앞서 존재한다. 그래서,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植木祭」)라는, 주체 밖에서 낯선 시간성이 이미 앞질러서 주체와 ‘마주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낯선 존재의 시간성을 지금여기의 시간성에로 불러들임으로써 존재는 비로소 상황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성은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가 한 곳에 문득 모이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한다. ‘빗소리’라는 유기체적 현존재가 「엄마 생각」이라는 이름의 시를, 비록 아리고 슬픈 내용을 담고있음에도, 속 깊고 생기 가득한 시적 존재로서 마주세운 것이다.

 

존재론적 시각에서 보면, 시 「엄마 걱정」은 제목에서도 엿보이듯이, ‘엄마’라는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존재성에로의 시간 여행을 시의 기본형식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적 자아가 성년인 지금, 유년으로의 추억 여행은 시적 자아와는 무관한 존재의 개입에 의해 시간은 이질적인 시간성으로 변한다. 어둡고 불안한 방안의 자아 속으로 흘러드는 고요히 빗소리에 의해 경험적 시간은 초월적 시간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돌연 시의 그늘이, 시적 자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시의 그늘에 의해 현재에서 과거로 진행하던 경험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은 새로운 근원적 초월적 시간의 지평을 열어놓는다. 또한 시적 자아는 유기체적 세계의 근원인 소리에 온통 몰입함으로써 유기체적 자아를 그림자로 자각한다. 자아의 그림자로서 유기체적 자아는 느닷없이 경험적 물리적 시간에서 벗어나 초월적이고 유기체적인 시간을 자각하게 된다. 가역적이고 모순적이고 반어적인 시간으로.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강조 필자)

 

시장에 간 엄마의 돌아오는 발소리가 안 들리는 어둡고 무서운 빈방 안으로 흘러드는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이 ‘빗소리’는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의 아이러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 발소리의 아이러니가 바로 ‘빗소리’이다. ‘빗소리’는 모든 살아있는 생물체의 필수조건인 물의 ‘소리’이다. 식물이나 동물 같은 유기체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비유기적인 것, 가령 물 바람 햇빛 달 해 따위를 포함한다. 위 시에서 유기체적 자아의 존재를 불러들인 것은 비유기적인 것으로서의 ‘물’의 존재감 즉 “고요히 빗소리”이다. ‘비’는 유기체적 존재의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인 ‘물’의 변신이다. 그러니, ‘빗소리’는 유기체적 자의식 혹은 무의식에서 발원할 수 있는 존재의 소리이다.

 

(기형도 시비, 사진=권미강 기자)

 

이 시에서 ‘빗소리’는 존재론적인 소리이다. 시적 자아는 어두운 유년기를 기억하다가 “고요히 빗소리”에 이르러, ‘기억하는 인식’은 사라지고 ‘기억나는 존재’를 접하는 것이다. 시적 자아가 접한 그 기억나는 존재가 ‘빗소리’이다. ‘기억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 과정에서 ‘기억나는 것’의 ‘갑작스런 틈입’이, 마치 접신接神의 기미幾微인듯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요히라는 소리 없음이 빗소리강력한 접물接物의 경지로서 부각시킨다. 이로써 자연적이고 보편적 존재자인 빗소리는 고유한 실존으로 변한다. 소리 없음이라는 고요한 무가 소리를 소리의 존재성으로 실존하게 하는 것이다.

 

유년기의 자아를 기억함 속에 기억남이 강력히 틈입함으로써 시적 존재는 비로소 존재 가능성 곧 시의 실존을 이끌게 된다. 어린 자아의 외롭고 어두운 빈방 안으로 흘러드는 ‘빗소리’가 물리적 현상을 초월하여 실존적 존재라는 것은, 모든 유기체의 필수조건인 생명수가 이 시의 근원적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곧 “고요히 빗소리”는 시 「엄마 걱정」을 인식의 대상으로서 시가 아니라 유기체적 존재로서 실존적 시의 지평을 열어젖힌다. 인식할 수 없는 “고요”의 존재감으로 인해 더 강력하게 ‘빗소리’의 존재를 ‘불러들이’게 되고, 또한 ‘비’의 존재를 불러들임으로써 시적 존재는 유기체적 존재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소리 없음이라는 무無의 기획 투사投射에 의해 ‘빗소리’를 존재 안으로 강력히 ‘불러들일’ 수 있게 되고, 이로써 ‘빗소리’는 ‘나’의 인식을 넘어서 유기체적 존재로서 시 속에서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고요히 빗소리”에서 보듯이, 기형도 시에서 ‘물’의 존재성은 안개, 비, 구름, 고드름, 얼음 등으로 다채롭게 변주된다. 여기서 시적 자아의 ‘그림자’로서 물의 변화를 통한 유기체적 자아의 존재성을 유추하게 된다.

 

(1)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물 속의 사막」의 부분

(2)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앞부분

 

위 인용 시구 (1)은 시 「물 속의 사막」의 부분이다. 물은 ‘장마비’로 변주된 채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내려 보내고 이윽고 아버지를 지우고 아버지와 몸을 바꾸는 비정한 존재로 그려진다.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인 물의 생명성은 더 이상 이 인간 세상을 살아갈만한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 세상은 타락하고 절망적이다. 그래서 거리의 빌딩 속은 악몽같은 타락한 세계임에도 장마비에 젖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삭막한 세계이며,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물들은 집을 버렸고’ 더욱이 물들은 ‘내 눈 속에서 더 이상 살지 않는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시 제목 ‘물 속의 사막’이 말하듯, 이러한 물은 반어적이고 역설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에서 인용한 시구 (2)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기형도 시에서 비 구름 바람같은 무생물, 나아가 ‘기쁨’ ‘이별’ 같은 추상적 개념조차 그것들이 주격으로 쓰일 경우에도 인식론적 주체가 아닌 인식을 초월한 주체 즉 ‘현존재들’이다. 중요한 것은 삼인칭 또는 너희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에서 알 수 있듯이, ‘기쁨의 현존재이면서 내 몸을 사용했던 이별의 현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존재 의식은 이성적인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비와 구름과 바람, 꽃과 나무, 기쁨과 슬픔, 이별 따위의 모든 존재들은 의 인식認識이 미치지 않는 초경험적 주체들로서 현존재의 형식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이성적으로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시적 자아 속에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자아가 시적 존재의 그림자로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기형도의 고유한 시적 존재가 품고 있는 환유換喩와 반어反語의 비유는 바로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러므로 시인 기형도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자연의 비유’들을 인간중심적 감성에서 나오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이나 이성적 주체에 의한 모더니즘적 지성에서 나오는 비유로 이해해선 안 된다. 『입속의 검은 잎』의 서문으로 쓰인 메모에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였다”는 시인의 고백은, 자연을 인간 이성의 지적 조작의 대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비정하고 삭막한 거리의 비유가 그 자체로 자연의 비유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기형도 시에서 비정한 도회의 거리는 자연의 반어였고 역으로 죽어가는 자연은 타락한 거리의 반어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적 사유의 명료한 예로서 그의 뛰어난 시 「죽은 구름」은 이 도시와 자연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반어의 세계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중략)

 

앞서 보았듯이, 「엄마 걱정」이라는 시를 시적 존재 가능성으로 불러들일 수 있게 하는 존재는 유기체적 자아이다. 시의 형식 차원에서 보면, 그 유기체적 자아가 시적 존재의 무의식 속에서 활동하면서 유기체적 아이러니를 낳는다. 기형도 시에서 인구人口에 널리 회자되는 속 깊은 유기체적 아이러니를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먼지 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부분(강조 필자)

 

기억은 스스로 기억한다. 주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스스로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을 기억 스스로에게 불러들임으로써 기억은 현존한다. 그러니, 기억함이 아니라 기억남이 기억의 실존이다. 기억의 주체는 ‘나의 인식’이 아니라 기억을 스스로에게로 불러들이는 것, 이 기억의 존재론에 대해 시인은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라고 간략히 적었다.

 

그러고 나서 기형도는 이렇게 기억의 싱싱한 자기 존재성 또는 자기 고유의 본래성을 “먼지 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라고 언명한다.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이미 지나친 물리적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훨씬 이전의 아득한 기억의 존재에 의해 스스로 기억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체적 시간성은 아주 오랜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음에 그치지 않고, 내가 처한 상황에 내던져진 존재 가능성으로서 이미 미래를 포함하게 된다. 유기체적 자아는 과거 기억에 머물지 않고 존재의 미래 가능성을 미리 선취先取하기에,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첫 시구

 

같은 희망의 언명을 적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이 시구는 ‘유기체적 세계 내의 존재’로서 자아를 자각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반어적 희망’의 언명인 것이다. 앞선 인용시에서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라는 시구도 사정은 같다. 이러한 긍정과 낙관의 시구들은 유기체적 자아의 반어라는 점은 자명하다.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보면, 낙관은 비관의 아이러니이며 희망은 절망의 아이러니이기 때문이다.

 

기형도 시에서 고드름 얼음 진눈깨비 밤눈 같은 겨울 이미지들은 모두 겨울의 아이러니이면서도 근원적으로는 물의 아이러니다. 따라서 어둡고 추운 겨울의 아이러니는 유기체적 아이러니로서 생명의 전개 과정 자체를 의미하고, 물의 아이러니는 생명의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을 품고 있다. 그러하므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는 시구는 유기체적 자아가 자기 존재의 고유성인 ‘반어적 존재’를 표현한 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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