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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감상

작품감상

위험한 가계家系 · 1969

1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
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
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 질렀
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
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5
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
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
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
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
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
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 뭉치를 감으며 어머니
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
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 반
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
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
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
요. 아버지의 꽃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
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물 속의 사막

밤 세 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숫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